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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상세정보

오인 misrecognition 誤認; 잘못 보거나 잘못 생각함 - 홍성혜展

  • 2017.08.11~2017.09.03
  • 대안공간 루프

오인 misrecognition 誤認; 잘못 보거나 잘못 생각함 - 홍성혜展

  • 주최 대안공간 루프
  • 참여작가 홍성혜
  • 문의 02-3141-1377
  • 홈페이지 www.galleryloop.com/

전시명
오인 misrecognition 誤認; 잘못 보거나 잘못 생각함 - 홍성혜展
기간
2017.08.11(금) ~ 2017.09.03(일)
전시시간
오전 10시 ~ 오후 7시
장소
대안공간 루프 / (04053)서울 마포구 와우산로29나길 20(서교동 335-11번지)
주최/주관
대안공간 루프
후원
서울문화재단
요금정보
-
1980, 90년대에 유년기 혹은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은 시각 매체에 친숙한 세대로, 그 누구라도 각종 잡지와 만화책은 물론 방과 후 시청했던 만화영화와 외화 시리즈, 비디오영화 등에서 우리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시쳇말로 순정만화의 실사판인 범접할 수 없는 서양인의 화려한 외모와 세련된 서구식 생활방식과 문화를 동경하며 ‘아름답고’ ‘현대적’이며 ‘진보적’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작가 홍성혜 또한 9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여느 영상세대처럼 서양의 이미지를 잠재의식 속에 당연한 것으로 흡수하고 생활 전반의 표준으로 삼으며 일상적으로 소비해왔다. 줄곧 서구 이미지에 둘러싸여 살아온 작가에게 거의 예외 없이 풍요롭고 행복한 일상을 포착한 1950, 60년대 미국의 광고 이미지는 노스탤지어로 작용한다. 일반적으로 과거를 떠올릴 때 단순히 감각적인 것들이나 장소, 시간, 혹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특별한 경험 또는 그와 관련된 감정들이 기억 저편에서 불쑥 나타나 아련한 추억에 젖으며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과거(nostos)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 또는 상실감을 느끼면서 갖게 되는 이 감정은 근본적으로 만족될 수 없는 욕구에서 비롯되는 고통(algos)과 괴로움을 수반한다. 유년시절, 서구 사회문화를, 더구나 1950, 60년대 미국을 한번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작가가 이러한 광고 이미지에서 향수를 느낀다는 것은 언뜻 모순된 심리적 징후에 가까워 보인다. 작가에게 있어 노스탤지어적 대상인 이러한 광고 이미지이란 언제나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하는 근원적인 것으로서 일종의 유토피아로 작용하는 듯하다. 엄밀히 말해서 이는 홍성혜에게 낯익고 친숙하며 언제나 되돌아가 안주하고 싶은 ‘상상적 기원’이자, 구체적이지도, 물리적으로 경험되지도 않고 이미지로 내재화된 욕망의 대상이다. 완전무결한 서구 이미지는 도달하기에 현재적 삶과 너무 동떨어져 존재하는 노스탤지어적 대상으로서 현실의 불완전함과 불충분함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며 끊임없이 더 나은 대상,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을 배가시킨다. 일상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 이상화될수록 현실이 더욱 초라해지고 불가능한 충족을 기대하며 결핍에 대한 보상을 호소함으로써 욕망은 결코 잠잠해지지 않고 계속 아우성친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와 매스미디어의 시각 이미지가 결탁하여 가공할 파급력과 설득의 효과를 발하는 광고의 작동방식을 연상시킨다. 불완전한 현재적 삶이 노스탤지어-상실감을 바탕으로 한 근원에 대한 그리움-에 대한 작동기제가 되듯 소비재의 결핍과 욕망 또한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적으로 맴돌며 이율배반적인 원리로 지탱하는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광고는 과거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자리를 대신해 물질적 소비주의 지향의 전일성을 지원하기 위해 세워진 제국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반복적인 소비 시스템-물질주의와 자본주의체제-에 자발적으로 동의하고 순응하게 만들기 위해 일정한 환영적 믿음-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을 조장하고 현실을 포장하는 이 대중 기만의 체계는 부지불식간에 자연스럽고 은밀하게 대중(소비자)의 생활태도, 가치, 선호, 습관 등을 변화시킬 정도로 일상생활과 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풍요와 행복, 새로움과 세련됨, 편안함과 안락함의 비전을 제시했던 서구의 이미지로 대변되는 준거적 표상을 작가는 언제 어디서든 각종 시각 매체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광고 이미지에서 찾게 된다. 특히, 홍성혜가 이러한 특징들이 일관되게 두드러져 있는 1950, 60년대 미국의 잡지 광고에서 주로 관찰한 공통된 특징은 풍요롭고 쾌적한 공간적 배경(중산층 이상의 가정과 그에 걸맞은 가구와 물건), 사회적인 성공으로 일정 수준의 부와 명예를 얻어 그러한 공간에서 여유롭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는 남편과 아내로 보이는 매력적인 여성(대개 성적 매력이 있거나 깔끔하고 단정한 차림의 남성과 여성), 그리고 총명하며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주제와 상황이 조금씩 다를 뿐 예외 없이 등장하여 광고의 주목적인 상품의 사용가치의 전달보다 이데올로기적 의미작용에 있어 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는 윌리엄슨(Judith Williamson)이 지적하듯이 라캉의 거울의 단계에서 설명되는 이상적 자아에 대한 실재적 자아의 착각, 오인 현상에 가깝다. 욕망의 기제가 되는 광고 속 인물과의 동일시와 일치의 노력이 제품 구매를 통해 해소될 수 있다는 광고의 주술적 작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설명에 따르면, 이러한 지배적 양식이 정당성을 획득하고 재생산되는 구조를 가능케 하는 오인(misrecognition)은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으로 작용한다. 작가는 ‘광고’를 그 기원이었던 (정치적) ‘선전’이라고 굳이 호칭하는데,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거나 강압적이지 않더라도 은밀함과 부드러움으로 포장된 선동의 논리에 길들여지고 정신마저 지배당해 결국 거기서 벗어나기 힘들게 만드는 이 이데올로기의 성채가 내뿜는 힘(권력)의 작용을 고려해 보면 보다 강한 어감의 명칭을 호출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홍성혜의 작업은 일견 조형성과 매체의 순수성을 탐구하는 듯한 색면 추상회화의 외형을 닮아 20세기 미술사를 평정했던 모더니즘의 강령을 새삼 채택하여 실천한다는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소비문화와 광고의 이데올로기적 작용에 대한 비평적 태도가 중요한 의미항으로 자리 잡고 있어 전혀 의외의 방향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작가는 ‘선전’에서 주로 밝고 화사하며 긍정적인 느낌의 색채가 전략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사람의 심리와 연계한 색채 연구 레퍼런스로서 에바 헬러(Eva Heller)의 『색의 유혹』을 참조하며 여기서 제시하는 심리나 감정 유형에 따른 색채배열을 회화의 기본 코드로 사용한다. 헬러의 색채배열표에 의하면 예를 들어, 사랑은 빨강과 분홍, 젊음은 연두, 노랑, 분홍, 하양으로 조합되어 있으며 가까움과 환희는 빨강, 오렌지, 노랑, 연두로 같은 구성이지만 차지하는 비율과 순서의 차이로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헬러의 색채배열들은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언어 기호의 의미작용과 마찬가지로 최소 단위 코드인 색의 분리와 조합, 배열이라는 여러 구성과 변형에 따라 다른 의미와 가치가 생성됨을 설명한다. 작가는 헬러의 색과 심리 관계 설문이 시행되었던 당시 한정된 쌤플링 및 표본 오차에서 비롯되는 일반화 오류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색채코드들을 일종의 상징적 캐논으로 상정한다. 광고 이미지와 함께 게재된 광고카피나 제품 설명 문구에서 심리나 감정 유형의 단어를 찾아 그에 상응하는 헬러의 색채배열표 색들을 혼합하여 단일색을 만들어 놓은 후, 배열표의 지침 안에서 흐리게 혹은 짙게 다채로운 변화로 색면을 채워 가는데 전체 그림에는 결국 색채배열표가 지시했던 여러 정서와 감정이 혼재하게 된다. 다양한 색상을 쓰기 위한 기초적인 재료로 쓰이는 혼합된 단일색은 색채배열표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전혀 다른 색을 만든다. 가령, 젊음을 뜻하는 연두, 노랑, 분홍, 하양을 배열표의 비율대로 모두 섞으면 옅은 노란색이 나온다. 이렇게 만들어진 혼합색은 색과 색의 관계가 전달하는 정서와 심리유형의 의미를 모호하게 하거나 해체시킴으로써 ‘선전’ 이미지가 애초에 사용했던 선명하고 화사한 색채 뒤로 감춘 진짜 의도(색), 즉 그 실체를 의도치 않게 드러내는 듯하다. ‘선전’ 이미지의 공간에 있어서도 행복과 풍요, 안정감 등 호감과 긍정의 느낌을 자아내는 전형적인 구도와 배치의 코드들(선적 요소들)이 분석을 통해 회화의 기본 데이터로 수집된다. 두 벽면이 만나는 지점이 만드는 삼각구도 안에서 가구, 인물, 사물, 제품 등이 안정적으로 배치되는 전형과 규칙들을 분석한 결과물은 우리의 취향이 조작되는 바로 그 공간을 더 명징하게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색과 선적 구도들은 회화의 기초적인 질료가 되어 다양한 조합과 구성으로 변주되는데 이 때 실내 공간의 기본 구도와 ‘Bathroom’이나 ‘Livingroom’과 같은 작품 타이틀에서 ‘선전’의 흔적들을 읽을 수 있을 뿐, ‘선전’ 이미지의 다양한 표면은 지속적으로 허물어지고 저마다 색다른 추상 풍경으로 변모한다. 작가는 아름다움과 풍요, 부와 명예, 그리고 행복이 영원한 정당성을 부여받는 현대 사회의 신화적 이미지들에 근거해 더 이상 신화 창조에 가담하지 못하는 코드들로 새로운 조합과 재구성이라는 기호놀이를 하며 신화의 독자(myth reader)인 우리에게 모던 추상회화 담론이라는 또 다른 미학적 오인의 덫을 놓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색면작업은 추상의 어휘를 레디메이드적으로 구사함으로써 모더니즘이 약속한 유토피아가 허구임을 빗대어 ‘선전’ 이미지가 제시하는 이상화된 모델 또한 거짓 환상임을 드러내고 이를 화면 안에서 와해시키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홍성혜의 색면회화는 모더니즘의 위력적 이데올로기가 강요했던 순수 형식주의나 정신의 독창적 산물, 초월적 세계의 반영물과는 거리가 멀다.

색면추상이라는 유사한 색채 구조에서 비롯된 다양한 분화와 변이의 무한성은 일종의 반복과 복제의 맥락에 있는 작업의 복선처럼 보인다. 홍성혜의 이러한 추상회화 작업이 광고 이미지를 대규모로 전파시키는 매체이기도 한 사진과 영상 작업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된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회화작업에서 보였던 색면추상의 패턴을 3차원의 공간에 고스란히 가져온 듯한 화면 구성은 오브제 배치의 실험들로 이뤄진다. 이 사진 작업들은 평면회화의 느낌이 강하여 비록 사진 매체이긴 하나, 회화적 충동의 연장선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작가는 비록 3차원의 공간이지만 부분적으로 평면성을 연출하는데 가령, 사진 세트장의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근경과 중, 후경의 오브제 사이의 거리감으로 인한 입체감이 최대한 생기지 않도록 치밀하게 배치, 구성하여 추상회화적 효과를 유발하는 식이다. 물감이 흐른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 천장에서 아래로 혹은 색면 위나 색면들 사이로 길거나 짧은 색테이프를 붙여 회화적 제스처를 노골화하기도 한다. 추상미술이 오늘날 아방가르드적 효력은 상실했지만 미술관이라는 신성한 공간에서 여전히 고급미술로 추앙받고 미술시장에서 자본적 가치에 비례해 비교적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며 댄디즘의 표상으로 높은 선호도를 보이는 장르임을 감안하면 실상 추상미술처럼 조성된 이 화면은 일회용 컵, 접시, 비닐 테이블보, 박스, 테이프, 도화지, 색종이, 아크릴 패널, 스티로폼 등 작가가 직접 구입한 싸구려 기성제품 또는 버려진 물건들로 구성되는 역설을 통해 자본과 미학적 엘리티즘이 만들어낸 허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기성 이미지를 쇼핑하듯 작업하는 작가가 후기자본주의사회의 소비자로서 사들인 기성제품으로 겉모습만 그럴싸하게 흉내 낸 고급미술은 그저 세속의 이미지일 뿐이다. 홍성혜는 이러한 사진 작업에서 ‘선전’ 이미지에서 관찰했던 유사한 형태의 오브제를 사진 세트장에 배치시키되, 서로 무리지어 놓거나 분산시키는 등 시각적으로 거슬리지 않는, 가장 보기 좋은 컷을 남기기 위해 조금씩 위치를 바꾸며 촬영을 반복한다. 이러한 작업은 대량소비에 상응하는 광고 미학이나 공정을 차용하듯 인스턴트 소비식의 빠른 배치전환과 그것의 무수히 많은 유사 컷들을 남기는데 각 사진들은 독립된 작품이자, 궁극의 완성된 작품에 이르는 과정의 집적이기도 하다.

작가는 더 나아가 오브제로 구성된 공간에 퍼포머를 투입시켜 사람과 배치된 사물과의 관계를, 사물과 즉흥적이고 자율적으로 소통하는 인물의 몸짓을 통해 관찰하는 영상 작업으로 이어나간다. 「Injoy」(2012)에 등장하는 여인은 이상적인 자아인 광고 속 가공의 인물이자, 그와 동일시하고자 하는 우리 자신, 다시 말해 광고의 초대에 응하는 소비자로서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광고가 소비자를 적극적인 소비주체로 나서도록 하기 위해 비어있는 광고의 공간으로 소비자를 호명(interpellation)하듯이 오브제가 배치되어 있지만 주체가 부재하는 가상적 공간의 부름에 응답하는 우리를 대신해 퍼포머를 투입시킨 것이다. 욕망의 민낯을 표상하는 나체의 여인은 공간에 놓인 사물과 관계를 맺으며 그 안에서 허구적 욕망의 충족과 환영적 정체성을 좇듯이 공허한 퍼포먼스를 이어나간다. 레고 시리즈 광고에서 착안한 최근작「Memory Set」(2017)에서는 마이미스트가 배치된 오브제를 사용하여 허공에 가상의 레고를 쌓고 허물기를 반복한다. 레고 블록은 근사한 차, 멋진 집, 동화 같은 도시와 같이 우리가 현실에서 가지지 못하는 것, 갈 수 없는 곳을 상상의 조립으로 실현시켜 주는 장난감이다. 비록 현실의 주체가 아닌 상상적 주체가 소유하거나 살아볼 뿐이며 그마저도 언제든 쉽게 허물고 또 다른 상상을 설계하지만 말이다. 여기서 ‘흉내’를 뜻하는 ‘마임(그리스어 어원 ‘mimos’에서 유래)’은 실체 없는 환상 실현을 위해 허공에다 레고 쌓기를 행하는 몸짓을 매개로 광고가 심어놓은 환상과의 거짓 동일시를 유비하는 것으로 읽힌다. 마임극이 관객의 상상력으로 완성되듯이 광고의 표면적 형식들-메시지를 전달하는 기호들의 배치는 우리 내면의 해석적 회로를 거쳐 의미작용하는 것이다. 이 회로는 우리가 사회화되면서 내면 깊이 자리하여 우리의 사고를 관장하는 코드의 집합으로 작동한다. 광고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 회로에 끊임없이 환상의 코드를 심는다. 이로써 자본주의 소비문화가 창안한 이 시대의 신화가 존속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상상의 세계도 아무리 현실과 동떨어져 보여도 고작 이러한 신화적 프레임 위에 건설된 세계일 뿐이다.

홍성혜의 작업은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서 내재된 신화의 이데올로기를 들추어내고 그 남용을 파헤쳐 조작된 기의가 만들어 내는 구조를 읽어 내며 그 속에 은닉된 또 다른 기의를 찾아내고자 한다. 특히, 광고의 이데올로기적 작동기제와 오인의 구조를 뒤틀거나 탈맥락화시키는 과정에서 소비문화와 광고의 은폐된 조작과 왜곡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폭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광고 텍스트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용도 폐기된 텅 빈 레토릭들을 재가공하여 회화를 비롯한 드로잉, 사진, 영상 작업을 반복적으로 넘나들며 행하는 다양한 조형실험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시각 미디어 환경과 스펙터클한 문화 속에서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찾아 나간다.
대안공간 루프 큐레이터
이정아

Travel_캔버스에 유화_ 200x200cm_ 2012

livingroom_캔버스에 유화_70x100cm_2012

Spring sale_캔버스에 유화_ 112x145cm_ 2017

Kitchen like this_캔버스에 유화_ 112x145cm_ 2017







조립 연작_종이에 색연필, 테이프, 색종이, 싸인펜_ 25x25cm_2017

movable parts_잉크젯 프린트_110x165cm_2017

any game_잉크젯 프린트_110x165cm_2017

very, very special_잉크젯 프린트_110x165cm_2017

build for fun_잉크젯 프린트_110x165cm_2017

no matter what they’ve created_잉크젯 프린트_110x165cm_2017

데이터기준일자
2017-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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